◇그르누이의 첫번째 살인 장면


타이틀이 담고 있는 이미지처럼, ‘광기’와 ‘엽기적 살인’으로 점철되어 있는 영화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초베스트셀러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이 작품은 현재 <300>과 함께 흥행 호조를 보이고 있다.

에필로그부터 영화가 심상치 않게 진행될 것을 예측케 하는 주인공 그르누이(벤 위쇼 분)가 세상의 빛을 보는 장면. 부모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생선 썩는 악취로 가득찬 시장 길바닥에서 태어난 그는 운명적으로 냄새와 민감하게 반응한다. 울음소리로 자신을 버리려는 어머니를 교수대로 보내고, 고아원에서 유년시절을 지낸 그르누이. 무두질 공장에 팔려가 혹사당하던 그는 알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어떤 여인을 쫓아가 첫번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에서 풍겨나오는 체취를 보존하는 게 평생의 숙원이라 직감한 그르누이.

쇠락한 향수제조업자 발디니(더스틴 호프만 분)를 찾아가서 자신이 고안한 향수로 그를 돈방석에 앉히고 신임을 얻는다. 하지만 그르누이의 진정한 목표는 최고의 향수를 얻고 이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었으니. 이후 아름다운 여인을 살해하고 그녀의 체취를 담아내려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그르누이. 엽기적인 살인은 계속되고 도시 전체는 공포에 휩싸인다. 마침내 범죄행각이 탄로나 처형장으로 향하는 그르누이.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않은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중략)

◇광기어린 표정으로 향수를 만드는 장면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18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천부적으로 예민한 후각을 지닌 천재의 짧은 일대기를 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냄새를 지배하고 싶어했던 주인공은 최상의 향수를 얻기 위해 연쇄 살인마가 된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주인공 그르누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발디니도 외동딸을 지키려고 헌신적 사랑을 보이는 리치스(알란 릭맨 분)도 마치 종교적 신념과도 같은 그르누이의 광기에 묻혀버린다. 단지 향수를 얻기 위해 살인행각에 나서는 그의 행동에는 일말의 윤리관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하긴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첫 번째로 살해한 여성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가장 극적인 반전은 주인공이 악취가 진동하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끔찍한 방식으로 생을 끊는 장면이다. 그는 결코 참회하기 위해서 원죄의 장소로 돌아가 자살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지배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지만 그 자신 향수에 취할 수 없다는 점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교황에게 향수가 뿌려진 편지를 보내 자신을 새로운 메시아로 선포하게 만들 정도의 마력을 지녔지만, 정작 그걸 만든 사람에게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모순을 보고 세상과 자신을 향해 냉소를 보낸 것이다.

영화는 근대 프랑스의 풍속도를 보듯이, 디테일한 영상미를 보여주고 있다. 쥐스킨트가 집필 당시 18세기 파리의 대형지도를 벽에다 붙여놓고 탄생시켰듯이, 감독 톰 튀크베어도 한폭의 그림같은 영상을 담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타이틀 롤을 맡은 벤 위쇼를 비롯한 주요 배역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특히 벤 위쇼는 원작에서의 추물과는 달리 반듯한 외모와 무심한 듯하면서도 광기어린 표정연기가 압권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흉측한 모습보다는 평범하거나 심지어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악인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바로 <양들의 침묵>에서의 렉터박사(안소니 홉킨스 분)를 두고 한 말이다.

◇처형장에서 향수로 군중을 현혹하는 그르누이


주지하듯이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탄탄하면서 세련된 시나리오, 생생한 시대 재현을 위한 로케이션과 세심한 의상, 그리고 주요 배역들의 훌륭한 연기 -이 모든 것이 영화 <향수>를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에필로그의 끔찍한 장면을 비롯해서 주인공 살인마의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한니발 라이징>의 젊은 렉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르누이와 렉터 모두 연쇄살인마이자 죄의식이 결여된 인간이다. 물론 그르누이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렉터에 비해서 보다 인간답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엽기적인 살인마이자 향수 제작의 귀재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은 다신 떠올리기조차 싫은 장면이다. 그건 죄인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또 다른 엽기적인 살인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영화를 보면 스크린 속의 픽션(fiction) 이상으로 더욱 잔인하고 참혹한 현실세계의 팩트(fact)가 떠오른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비롯한 엽기적인 사건들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범죄자에게만 집중하듯이, 현실 세계에서도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한 사형제 존속 여부 논란만 있을 뿐 -유가족들이 평생동안 겪어야 할 참담한 고통은 도외시하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출처 : 세계일보 e-컬럼